한 직장에서 부서를 옮기면서 10년간 상사로 모신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인연이다. 그것도 상사가 점찍어 부서를 이동할 때마다 부른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먼저 옮긴 뒤 우연히 상사도 같은 부서에 발령받아 함께 일하게 된 경우라면.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운영.관리하는 ㈜63시티 정이만 사장에게는 그런 상사가 있다. 1998년 작고한 김창수 전 한화 전무다. 80년대 중반 정 사장이 기획관리실 대리일 때부터 구매부.비서실 등으로 옮기며 10년을 함께 일했다.

정 사장은 "반드시 현장을 챙기고 또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보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고객사에 불만이 있을 때는 당장 원인을 파악하러 공장 등에 달려가야 했다. 전화로 파악한 내용은 보고를 받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 정 사장이 기획관리실 대리 때의 일. 채권과 어음관리 실태를 보고하는데 김 전무가 질문을 던졌다. "어음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관리장부와 대조해 봤느냐고 추궁하는 게 아니라 어음이 뭔지 속속들이 알고 난 뒤에 관리실태 파악에 나섰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정 사장은 "관리체계의 문제점만 파악했을 뿐 어음 실물을 보지 못해 몹시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일하면서 정 사장은 현장과 실물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됐다고 한다. 스스로 "현장을 봐야 속이 편해진다"고 할 정도다. 63빌딩의 식당에서 새 메뉴를 만들 때 정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직접 맛을 보고 토론하는 것부터가 당시 체득한 '현장 제일주의' 경영에 따른 것이다.

김 전무는 또 "뭐든 자꾸 해봐라. 그래야 실력이 는다"고 강조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이건 나와 직접 상관 있는 일이 아니니까"라며 손대지 않는 것도 시간만 낼 수 있다면 무조건 해보라는 얘기였다. 이를 따른 덕에 정 사장은 그룹 내에서 '일 욕심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중요한 것은 부지런함보다는 인격이다." 정 사장이 지금도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김 전무의 가르침이다. 정 사장은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르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정 사장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인격수양에 힘쓴다고 했다. 마음으로 따르는 직원이 많아야 최고경영자의 체통이 서고, 그래야 조직이 원만하게 굴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