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은 ‘신경영 선언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핵심사업으로 ‘나라를 위한 천재 키우기’를 발표했다. 삼성이 새로운 화두로 내건 ‘핵심인재 - 천재경영 전략’은 과연 무슨 내용이며,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이건희 회장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 회장의 인재 철학을 살펴본다.
이건희 회장은 다른 경영자에 비해 ‘사람’에 대한 욕심이 무척 강하다. 사색을 즐기고 비유법 구사에 능한 그가 “내가 사람에 대한 욕심은 세계에서 가장 많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할 정도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인재가 아니라 핵심인재 - 천재다.
도대체 ‘지금 핵심인재 - 천재가 왜 필요한가’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오래 전부터 5~10년 뒤 우리나라가 무얼 먹고 살아가야 할 지 고민했는데, 바로 이거다 하는 것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흐름이나 기술발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린 결론은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뛰어난 인재를 찾아내고 키우자는 것이지요.”
가령 한국이 5~10년 뒤에도 먹고 살려면 중국이 쫓아오지 못하는 첨단산업을 이른 시일 내에 찾아 키워야 하고, 그러자면 천재급 두뇌가 나서 앞에서 끌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21세기에는 하도 변화가 심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누구도 점치기 어려우므로 분야별로 천재급 두뇌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시장이 어떻게 변하든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고 이 회장은 힘주어 말한다.
그는 “21세기는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전쟁 시대”라고 정의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일등에게 모이고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진다”는 얘기다. 어디에든 일등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일등 국가와 일등 기업에 신세지면서 근근이 살아가게 된다고 그는 예측했다. 지금은 컨베이어 벨트에 수십 명, 수백 명이 매달려 물건을 만들고 있지만 앞으로는 천재급 인재 한 사람이 제조공정 전체를 대신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가령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개발하면 1년에 수십억 달러를 간단히 벌어들이고, 수십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이 회장은 반문했다. 삼성에서는 첨단 D램 개발의 주역인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같은 사람을 그런 반열에 꼽는다.
이 회장은 전체 국민소득을 높이기 위해서도 천재가 필요하다고 무척 조심스레 얘기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1만 달러에서 멈춰선 지 8년이나 됐고, 지금 집단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노사 문제가 빈번해지는 ‘마(魔)의 1만 달러시대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는 먹고 입는 것은 해결되지만 집 문제는 100% 해결이 안 되고, 이것 때문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고 진단했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더라도 이 시기에 사회 갈등이 많아지고 노사 문제도 심각해진다고 이 회장은 설명했다. 일본만 해도 1만 달러 시대까지는 춘투(春鬪)가 심각했지만, 1만5000달러가 되면서 잠잠해졌고, 2만 달러 시대가 되면서 사회가 안정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가는 데 6년밖에 안 걸렸는데, 왜 우리는 8년씩이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가?” 이 회장은 이 같은 근본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일본보다 땅도 좁고 시장도 작고 자본도 적은 우리가 유일한 경쟁력인 핵심인재를 키우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지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지나친 평등주의가 수십만 명 먹여 살릴 핵심인재 - 천재 못 키우게 한다”
이 회장은 “천재란 우리 국민의 고정관념에 스며들어 있는 ‘기계적 평등주의’를 극복해보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능력과 실적에 상관없이 대우는 똑같거나 비슷해야 한다’는 철학에 대해 그는 강력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 회장은 “우리 사회는 이공계를 기피하는 분위기와 지나친 평등주의 때문에 한명이 수만 명,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천재를 키우는 교육을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럼, 천재를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질문에 이 회장은 “빌 게이츠가 미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나 빌 게이츠가 있었겠나?”라고 반문했다. 국가의 정책과 전략이 천재양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얘기다. 이 회장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유분방하고, 노력하고 이긴 대가가 확실히 따르는 나라이기에 그런 천재가 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은 사립학교에서 천재 급을 키우고, 이것도 모자라 이민(移民)을 통해 세계 각국의 이공계 두뇌를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국력이란 것이 다른 건가요. 이것이 바로 국력의 차이로 나타난 것이지요.”
이 회장이 아들 이재용(李在鎔) 삼성전자 상무와 함께 1500억원의 기금(基金)을 출연해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을 지난해 설립한 것도 그런 동기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빌 게이츠 같은 천재를 찾아서 10년, 20년에 걸쳐 육성해 보겠다는 뜻입니다.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상이 자유롭고 생각이 기발해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지금껏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회장은 “삼성이 나라의 인재 키우기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나라 덕분에 (삼성이) 이만큼 성장했기 때문에 천재 양성을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해보자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천재 없으면 準천재라도…” 작년 국내외서 500명 뽑아
삼성 계열사 사장들은 요즘 ‘천재급 인재 확보’ 생각뿐이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기회가 날 때마다 사장들에게 “부하 직원 시키지 말고 직접 나서서 천재 후보를 뽑아 오라”고 다그친다. 외국 출장 가서 그 걱정에 잠자다가 벌떡 깼다는 CEO도 있다. 우수 인재 확보 결과는 사장들의 인사고과(30% 안팎)에 반영된다. 하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못마땅하다고 말한다.
“2년 전부터 우수한 기술자를 무조건 뽑으라고 했고, 전자 계열사에 A급 기술자를 많이 데려오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강조해도 실감이 안 나는 모양입니다.”
이 회장은 “아직 삼성 내에 ‘천재’로 분류할 사람은 없지만, 그에 준하는 인재라도 무조건 많이 확보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삼성은 지난해 국내외에서 준(準) 천재급 인력을 의미하는 S(super)급 인력을 500명 정도 뽑았다. 아파트·승용차 제공은 기본이고, 일부는 CEO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인재 확보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천재는 확률적으로 만 명, 십만 명에 한 사람 나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잘해야 400∼500명입니다. 그래서 해외로 시야를 넓혔고, 95년부터 지금까지 100여명을 키웠죠. 이들이 혹시 삼성을 떠나더라도 삼성에 호감을 갖게 되고 지한파(知韓派)·친한파(親韓派)가 됩니다. 앞으론 기초기술이 강하고 인재 확보가 쉬운 러시아·베트남·중국에서 가리지 말고 천재를 끌어와야 합니다.”
삼성은 해외 우수인재 확보와 관리를 위해 미래전략 그룹을 만들었고, 중국과 동유럽에 3개 등 모두 12개의 글로벌 연구개발(R&D) 센터를 구축한다. 현재 삼성에 재직 중인 연구개발 인력은 지난 88년과 비교하면 2.6배나 늘어났다.
이 회장은 “반도체만 해도 천재가 20~30명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 잡을 확률을 생각해보라.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은 일단 다 뽑아 놓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다른 기업은 아우성이다. 모 그룹의 미국 주재원은 “삼성에서 쓸 만한 미국 대학 졸업생을 싹쓸이해 가는 바람에 허탕만 쳤다”며 “우리가 ‘찜’한 사람까지 데려가 버리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소연했다.
이 회장이 특히 주목하는 인재는 끼있는 사람과 여성이다. “개성이 강하고 끼있는 사람을 ‘건방지다’ ‘말을 함부로 한다’ 하여 기를 죽이면 안 됩니다. 또 21세기 소프트 시대, 감성시대에는 여성 인재가 중요합니다. 다른 나라는 남녀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습니다.”
제일기획이 신춘문예 당선자나 대학가요제 입상자, 삼성SDS가 해커 경력자, 제일모직이 이탈리아에서 이름을 날리던 여성 디자이너 이정민 상무보를 스카우트한 것도 그런 사례다.
하지만 삼성이 우수 인재를 한데 끌어 모으면서 문제점도 발생하고 있다. 다름아닌 ‘왕따’다. 이 회장은 “천재를 뽑아오는 것보다 이미 확보한 천재급 인력을 내보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명을 확보하는 것보다 10명을 내보내는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한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S급으로 스카우트한 김모 부사장이 어눌한 우리말로 프레젠테이션하는 모습을 일부 간부들이 비웃자 “뒤에서 놀리거나 흔드는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 회장의 천재경영론은 ‘팀워크 플레이’보다 ‘개인기(個人技)’를 중시한다. 그러나 삼성은 국내 어느 기업보다도 잘 짜여진 시스템을 통해 성장해온 기업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삼성그룹 내에서 ‘천재’와 ‘시스템’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주목거리다.
황동조(04-07-19 06:41)
삼성그룹의 천재경영... "인재중시"의 전략은 모든 기업이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것은 멘토링의 정신이기도 하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